한국의 전력시장은 오랜 기간 동안 한국전력이 사실상 독점적으로 운영해왔습니다. 가정용은 물론 산업용 전기까지 대부분의 소비자는 한전을 통해 전기를 공급받았죠. 하지만 최근 기업들이 전기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리면서 전력시장에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전기 직구’라 불리는 이 제도는 전력거래소에서 전기를 도매가격으로 직접 구매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전기 직구는 사실 새로운 제도는 아닙니다. 2001년 전력시장 구조 개편의 일환으로 도입됐지만, 산업용 전기요금이 한전에서 워낙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활용은 극히 미미했죠.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전력거래소가 ‘전력시장운영규칙’ 개정을 통해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 개정안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기위원회가 최근 의결하며 제도화가 마무리됐습니다.
전기를 직접 살 수 있는 기업은 누구인가?
전기 직구는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핵심 기준은 바로 3만 kVA 이상의 수전 설비를 갖춘 기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약 3만 가정이 동시에 사용하는 수준의 전력 사용량으로, 일반 제조업체나 중견기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 데이터센터
- 반도체 제조 공장
- 정유 및 화학 플랜트
- 초대형 IT기업
위와 같은 초대형 전력 수요 기업만이 이 제도의 실질적인 대상이 됩니다. 현재 기준으로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국내 기업은 약 500여 곳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전체 전력 소비자의 0.0002%에 불과하지만, 소비 전력 비중은 무려 29%에 달합니다.
또한, 직접구매계약은 최소 3년 이상 유지해야 하며, 중간에 다시 한전과 계약을 맺을 경우에는 일정 기간 동안 재진입이 제한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의무 사용 기간의 3배에 해당하는 제한이 적용됩니다.
직접구매의 경제성은 얼마나 클까?
전기 직구의 가장 큰 장점은 가격입니다. 전력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도매가격(SMP·계통한계가격)은 최근 기준으로 kWh당 평균 124.7원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한전이 판매하는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약 182원 수준입니다. 단순 비교만으로도 약 31.5% 저렴한 셈이죠.
하지만 SMP는 시간마다 가격이 변동하는 시장가입니다. 예를 들어, 2022~2023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외부 충격이 있었을 때는 평균 도매가격이 181.9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당시 한전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136.2원으로 훨씬 저렴했죠.
결국, 직접구매가 항상 저렴하다고 보기 어렵고, 시장 상황에 따라 유불리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한전의 재무 구조에 미치는 영향
이 제도가 한전의 재무 상태에 미칠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기업 500곳이 전체 전력의 29%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한전과 거래를 중단하고 도매시장에서 전기를 직접 구매하게 된다면, 한전은 대규모 매출 손실을 겪게 됩니다.
이 손실은 결국 누군가가 메워야 하는데, 유력한 후보는 바로 중소기업, 소상공인, 가정용 전력 소비자입니다. 실제로 한전은 지난 2년 동안 산업용 전기요금을 38% 인상하며 적자를 메워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일반 소비자의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전력업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를 ‘탈(脫)한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산업용 전기요금을 낮게 유지하면서 적자를 감수해오던 한전이 이제는 그 비용을 일반 국민과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셈입니다.
전기 직구 제도의 향후 전망
긍정적 전망
- 대기업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력 확보
- 에너지 구매의 유연성 증가
-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자체 전략 수립 가능
부정적 전망
- 중소기업 및 일반 가정의 전기요금 인상 압력
- 한전의 구조적 재정 악화
- 전력시장 가격 변동성 증가로 인한 위험 확대
제도 정착을 위한 과제
- 가격 안정성을 위한 정책적 보완
- 소규모 기업이나 친환경에너지 연계 구매 모델 개발
- 전력망 운영의 안정성과 공공성 유지 방안 마련
마무리
대기업의 전기 직구도 활성화는 분명히 새로운 전력시장 패러다임을 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에너지 위기와 기후위기 시대에 에너지 효율성과 자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죠. 그러나 동시에 공공성을 중시해온 전력시장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의 부담이 커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제도가 어떻게 자리잡을지, 또 중소기업과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면밀한 관찰과 추가적인 제도 보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전력은 공공재입니다. 에너지 시장의 개방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로 인한 이익과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